사색

"죽은 농부와 소" 이야기를 통해 본 군주와 신하

루키~ 2022. 10. 5. 08:28

김진명의 역사소설 "고구려"에서 고국원왕의 아들 구부는  제왕의 도리와 통치의 이념을 찾기 위해 당대의 군웅들에게 "죽은 농부와 소"에 대해 물어본다.

"죽은 농부와 소를 본 적이 있습니다. 소는 이미 시체가 된 지 오래인 제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더군요. 굶어 죽을까 걱정하여 몇 번 쫓았으나 그 미물은 결코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 이유를 아시는지요?"

농부는 군주에, 소를 신하에 비유해서 군주와 신하는 어떤 관계인지를 확인한 것이다. 
이에 백제의 부여구는 의리를, 연나라 모용황은 채찍을, 조나라 석호는 불심을, 고구려 사유는 연민으로 자신과 백성을 연결한다. 오히려 고구려의 일반 농부는 백성이 주인이라는 구부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각자 생각해 보면서 읽어보기 바란다. 

백제의 근초고왕(부여구)의 답변
"농부는 풍작을 하리란 꿈과 의지가 있었고, 아무런 이유없이 그저 살아 있기만 하던 소는 그 꿈과 의지를 농부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다. 소는 농부가 그 꿈과 의지를 향해 달려가는 내내 그와 함께했을 것이며, 마침내 달성하였을 때에 함께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다. 풍작의 결과물은 소에게도 일정량 돌아갔을 것이며, 그때 소는 마치 제 꿈이 이루어진 양 행복했을 것이다.
이제 농부가 죽었으니 소는 꿈도 의지도 잃었다. 그런 까닭에 갈 곳 또한 잃고 그 자리에서 과거의 기억만을 되새기는 것이다."

연나라(선비족) 왕 모용황의 답변
"채찍이다. 소는 주인의 채찍을 맞는 것이 두려워 주인이 시키는대로 평생동안 일만 한다. 왼쪽으로 가야 할 때에는 왼쪽으로 갈 때까지 채찍을 맞고, 오른쪽으로 가야 할 때에는 오른쪽으로 갈 때까지 채찍을 맞는다. 일어나는 것도, 눕는 것도, 먹는 것도 모두가 채찍을 맞기에 할 수 있다. 이제 주인이 죽었으니 소에게 채찍을 내려줄 사람이 없지 않으냐. 죽은 주인의 곁을 떠나 먹을 것을 찾으라고 채찍을 때려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조나라 왕 석호의 답변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 많고 많은 인연 중 평생을 섬기는 주인으로 만난 인연이란 단연 으뜸일 터. 그 무거운 인연을 어찌 끊고 떠나겠는가. 아마도 소는 다음 생애에 있을 인연을 위하여 제 의리를 지켰으리라. 누가 소에게 가르쳐주지 않아도 안 것이니 참으로 석가의 덕이 깊다 할 만하다."

고구려 태왕인 구부의 아버지 고국원왕(사유)의 답변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아비는 그 농부가 밉구나. 제가 죽을 것을 알았다면 소를 어디에라도 보냈어야 하지 않겠느냐. 농부가 제 생각만 하였으니 소가 그리 굶는 것이 아니겠느냐." 

고구려 적리성 일반 농부의 답변
"밭을 갈아줄 농부가 죽었잖습니까. 소는 밭을 갈아야 먹을 것이 생기는 법인데 농부가 죽었으니 누가 함께 밭을 갈아줍니까. 제 밭을 갈도록 씨를 뿌려줄 농부가, 수확하여 여물을 먹여줄 농부가 죽었으니 어쩌겠습니까. 밭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까 소에게는, 소에게는 농부가 제 일꾼이었다는 말이냐?"
"물론입죠. 인간이야 소가 일꾼이라 생각하겠지만, 어디 소도 그리 생각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