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미니서평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 혁명의 3대정신으로 잘 알려져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만들어진 인권선언에서 평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모든 시민은 법 앞 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지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 프랑스의 평등에서는 능력, 덕성, 재능에 의한 차별이 허용됨을 알 수 있다. 우리도 기회의 균등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기회는 평등하게 주었다. 다만, 능력에 따른 차이와 차별이 있을 뿐이다.
평등한 사회에서도 능력에 따른 차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이런 생각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린다. 능력주의가 만들어내는 승자와 패자, 사회적 상승의 포장, 학력주의와 같은 불평등한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현재 우리의 교육 시스템을 보면 샌델 교수의 주장에 고개가 끄떡여지기도 한다.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샌델 교수의 명저인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처럼, 이 책에서도 열린 결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다만,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 SAT 의존도를 줄이고 제비뽑기와 같은 추첨을 제안하기도 한다. 대학의 인재 선별을 위한 추첨안에 대해 직접 반론을 제시하고 답을 하는 부분은 흥미롭기도 했다.
또한, 샌델 교수는 소비와 생산 등의 경제활동, 일의 존엄성, 노동시장 등에 대해 기존 철학자들의 다양한 생각을 정리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간략하게 옮겨본다.
애덤스미스 '국부론' - 소비는 모든 생산의 유일한 목표이자 의미다. 그리고 생산자의 이익 추구는 오로지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데 있어야 한다.
존 케인스 - 소비란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인간의 번영이 "우리의 본질을 우리의 역량의 배양과 실행을 통해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마틴 루터 킹 목사 - 청소 노동자들의 존엄을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점에 결부시켜서 이야기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일을 통해 사람은 인간으로서 충족되고, 그리하여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일은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정체성이 국가 전체와 이어지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의 일은 그의 동포와 함께 공동선을 계발하도록 해준다.
독일 사회이론가 악셀 호네트 - 오늘날 소득과 부의 분배에 대한 논쟁은 인정과 명망에 대한 갈등으로 이해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헤겔 -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시스템을 넘어, 노동 시장은 인정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다.
프랑스 사회이론가 에밀 뒤르켐 - 해겔의 노동론을 토대로 "노동분업은 사회적 연대의 원천이 되어야 하며, 모든 이들은 공동체에 기여한 실제 가치에 근거해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밑줄긋기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가 빚어낼 오만과 분노를 예견했다. 1958년 출간한 "능력주의의 등장"이라는 책에서, 그는 어느 날인가 계급 장벽이 극복되고 누구나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진정 공평한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서적 관점의 두가지 특징이 오늘날의 능력주의와 유사성을 드러낸다. 우선 인간의 능력에 대해 한껏 강조한다. 또한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둘 다 냉혹하다. 다른 점이라면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성서적 능력주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빌 클린턴은 레이건의 구호를 받아들이고 자주 써먹었다. "우리 모두가 사회적 상승의 기회를 갖는다는 아메리칸 드림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이상이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지키며 행동한다면 신이 주신 능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뻗어갈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능력주의의 폭정은 사회적 상승의 담론 그 이상의 것들에서 비롯된다. 첫째,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메시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의 사기를 꺾는다. 두 번째, 대학 학위가 그럴 듯한 일자리를 얻고 품격 있는 삶을 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는 주장은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뜨린다. 셋째,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그것이 사회적 상승 담론의 포인트였다. 성공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직업과 기회가 능력에 따라 배분되더라도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는다. 불평등 구조를 능력에 따라 재구축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재구축은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가졌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더 벌려놓는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단지 부자의 자식과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하여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오르거나 떨어지거나 모두 그들의 능력과 재능의 소관이다.
성별, 인종, 민족적 차이에 대해 훨씬 관용적인 태도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 엘리트는 계층 이동이 활발한 사회를 못 만들어냈다. 대신 그들의 특권을 어떻게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 감을 잡고 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해 주는 방법이 아닌, 능력주의적 사회에서 성공을 결정하는 입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SAT 의존도를 줄이고 유능력자를 제비뽑기하지는 의견에 대한 네 가지 반론과 답변
첫 번째, 학업능력의 저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얼마나 적절히 1차 관문을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
두 번째, 다양성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원칙적으로 추첨은 다양성 확보를 위해 조정 가능하다.
세 번째, 동문 자녀 우대 입학과 기부금 입학은? 이상적으로는 우대 혜택은 없애야 한다. 만약 필요하다면, 추첨권을 하나가 아닌 두 개 이상 주도록 하면 된다.
네 번째, 입시가 경쟁이 아니라 추첨이 되면 그 가치는 보다 떨어질 테고, 그러면 지금의 명문대가 누리는 명예는 추락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럴것이다. 인재 선별과 명예 추구 관행을 없애는 일은 추첨제의 미덕이지 결함이 아니다.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상승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 만족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에 실패함으로써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공동선의 두가지 개념 중 하나는 소비주의적인 공동선, 다른 하나는 시민적 공동선이다. 소비주의적 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가 활기찬 공동의 삶을 영위하든, 우리와 같은 사람끼리만 모여 각자의 소굴에서 사적인 삶을 살든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시민적 공동선을 고려하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