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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2.31 삶을 사랑하는 기술 - 흔들리는 나에게 철학을 권하다
  2. 2013.04.26 소크라테스의 변명

삶을 사랑하는 기술 - 흔들리는 나에게 철학을 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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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젊은 철학자 줄스 에번스의 "삶을 사랑하는 기술"은 철학에 관한 책이다. 

철학적 사색과 고대 현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좋은 삶을 찾아가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그는 하나의 철학적 사상에 몰입하지 않고 각각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취해야 할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 

삶을 되돌아보고 행복을 추구하고 싶다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리스 철학은 보편적으로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먼저 다루고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법을 배워서, 부정적인 감정이 발목을 잡을 때면 스스로 

"내가 지금 현명하게 반응하고 있나?"

"이 반응은 합리적일까?"

"더 현명하게 반응할 수 있었을까?"라고 묻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습관이 몸에 배면 소크라테스적 능력을 평생 지니고 살 수 있다. 

 

어떤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스스로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더 심하면 화를 내기도 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소크라테스적 능력이 아닐까 한다. 바로 질문이다. 


다음은 에픽테토스가 중심인 스토아학파의 이야기다. 


영어 Stoic은 그리스어 Stoa Poikile에서 유래했다. 

이는 '채색된 돌기둥들'이라는 뜻으로, 초기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남자든 여자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그리스인이든 이방인이든,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철학을 가르치기 위해 모였던 곳인 아테네 시장의 돌기둥들을 가리킨다. 


스토아철학은 소크라테스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뒤이지 사냥감을 찾아 헤매던 몇몇 제국이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하던 기원전 3세기에 생겨났다. 

스토아철학은 그런 혼란스런 상황에 맞서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스토아 철학사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외부 조건에 대한 집착이나 혐오를 극복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라가 짓밟히고 독재자에게 고문을 당할지라도, 내면의 자유와 외적 저항이라는 그들의 철학은 기원전 1세기에 로마로 퍼져나갔고, 

로마의 정치가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스토아철학의 저항' 운동에서 제국주의 독재에 대한 공화주의자들의 저항을 뒷받침하는 철학으로 이용되었다.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버리고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우리의 믿음에 책임을 지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의 잘못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우리의 책임이다"

또한, 세네카의 이야기처럼 화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스토아 철학자'의 현대적 의미가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사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고 이썼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말한 것처럼, 감정에 대한 스토아철학의 분석은 "서양철학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절묘하고 타당성이 있다."

스토아철학을 통해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며 어떻게 감정을 바꿀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쿠로스학파의 이야기이다. 


스토아학파와의 적대감과 경쟁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학파는 스토아학파와 '치유로서의 철학'이라는 개념을 공유했다. 

두 학파 모두 철학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한쪽은 정서장애로 이어지는 잘못된 믿음을 없애도록 도와줌으로써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주장했고, 

또 한쪽은 자급자족하며 평온하게 살도록 내버려둠으로써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철학을 실천하는 건 스토아철학만큼 힘이 들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어도 되는 건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우리는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들을 연습해야 한다"라고 썼다. 

즐거움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잘못된 곳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잘못된 선택은 감정적 동요를 부른다. 따라서 인간은 합리적 쾌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다음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로 알려진 이오니아학파의 사색하고 조망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초기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걸쳐 오늘날의 터키 서해안에 해당하는 이오니아 반도에 살았기 때문에 '이오니아 학파'라고 불린다. 

이오니아학파 철학자들은 우주를 초자연적 힘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하기보다는 자연상태 그대로, 즉 물질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7세기 말에서 6세기 중반까지 살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철학자 탈레스는 우주의 기본 요소가 물이며, 그것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그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인간이 좀 더 원시적인 형태의 생명체로부터 탄생했고, 생명체들은 흙과 물에서 진화했다는 주장을 최초로 제기했다. 

그의 제자 아낙시메네스는 우주의 기본 요소가 공기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거대입자가속기로 '신의 입자'를 찾고 있다. 

그러니 사실 우리는 옛 철학자들이 2,500년 전에 시작한 우주의 기본 원소 탐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이 우주의 기저를 이루는 영구적인 요소를 찾던 곳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끊임없는 흐름과 변화를 보았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모든 것은 흐른다. 가만히 멈춰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회의론자들의 의심하고 비판하는 방식은 질문을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회의론자들은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철학의 본질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스캡티코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조사하는 사람,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최초의 회의론자는 '피론'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반에 살았던 피론은 에피쿠로스를 비롯해 최초의 스토아 철학자들과 동시대 인물이다. 


디오게네스로 대표되는 무정부주의의 견유학파도 나온다. 


견유학파는 인간이 문명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들의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생활 방식은 오늘날 길거리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견유학파의 영어 표현인 cynic은 kynikos에서 온 것이다. 

그런 만큼 원래 cynic은 문명의 잘못된 가치를 버리고 가난하고 금욕적이며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뜻했다. 


견유주의적 대응은 현실성을 지니기에는 너무 극단적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가족을 갖길 원하고, 국가가 어린이, 병든 사람, 노인, 소수자를 보호해주길 바란다. 

무정부주의는 현실성 있는 대안은 아니다. 

비록 견유주의자들은 문명이 주는 편안함을 당연히 여기지 말고 문명이 붕괴될 때에 대비해 스스로를 단련시키라고 가르치긴 하지만. 


그리고 플라톤의 '국가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좋은 삶'으로 이어진다. 


긍정심리학자인 샐리그먼은 행복에는 다섯 가지 버전이 있다고 말하며, 

각 단어의 머리글자를 따서 PERMA라고 부른다. 

P(Positive emotion)는 긍정적인 감정, 또는 에피쿠로스철학적 의미로 기분이 좋은 상태를 가리키며, 

E(Engagement)는 참여 또는 어떤 활동에 몰입하는 느낌,

R(Relationship)은 관계, M(Meaning)은 의미 또는 가치 있는 고결한 명분을 위한 노력한다는 기분, 

A(Achievement)는 성취를 가리킨다. 

그는 이 다섯 가지는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좋은 삶은 이 다섯 가지 중 몇 개가 결합된 것이라고 말한다. 


고대 철학을 다시 꺼내온 이유는 궁극적으로 우리 삶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처럼 깊은 사색과 통찰력으로 나부터도 좋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피타고라스의 기억하고 매혹시키는 기술을 따라 아래에 주옥같은 내용들을 정리해 본다. 

자주 살펴보면서 삶을 되돌아보고 활기를 찾을 수 있도록 (단, 스크롤 압박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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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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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소크라테스하면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지함을 일깨우고 독이 든 성배를 마셔 법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 소크라테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의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 읽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보다 훨씬 읽기도 편하고 쉽게 느껴지는 책입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

통독: 2013.04.19 ~ 2013.04.22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서게 된 이유부터 최후 변론까지 정리된 글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연을 탐구하는 자라는 고소 내용중의 하나에 대해 

그는 자연철학자를 경멸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자연에 대한 사색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자연보다는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탐구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만났던 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정치인, 시인, 장인)은 모두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알지도 못하고 또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 모른다는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미움을 사고, 적을 만들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법정에 서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도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합니다. 

왠지 몰라도 아는척을 해야 이 분야의 전문가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죠. 

이 책을 읽으면서 현재 내가 아는 것도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이지 한번 더 자문해봤습니다. 


고발자인 멜레토스와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하는 방식이 처음으로 나옵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보면 끊임없이 질문을 하면서 본인이 원하는 결과로 이끌어내는 것 같습니다. 



몇 수 앞을 내다보고 모든 질문의 각본을 짜 놓고 진행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입니다. 

제기된 문제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통해 의사결정 트리같은 것을 만들어서 진행한다고 해야 할까요?

대화 중에 이렇게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사색과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조금이라도 훌륭한 사람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험을 헤아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어떤 일을 하면서 오직 올바른 행위를 하느냐 나쁜 행위를 하느냐, 

곧 선량한 사람이 할 일을 하느냐 악한 사람이 할 일을 하느냐 하는 것만 고려해야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확신하게 하는 무지가 아닐까요?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돈으로부터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덕으로부터 돈과 기타의 좋은 일이 생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입니다. 


이후 유죄 투표 전까지의 글을 보면 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준법 정신을 알 수 있습니다. 

법에 따르지 않는 재판들의 사례나 법정에서 감정에 호소하고 그에 따른 판결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나 용기 또는 다른 덕이 우월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품위를 훼손시킨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행동입니까? 

고명한 사람이 법정에 서면 아주 딴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형을 당하면 무서운 일을 겪게 되고 여러분이 그들을 살려주면 영생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듯 했습니다. 


요즘도 법원에 출두할 때마다 등장하는 휠체어를 생각해 보니, 소크라테스의 시대뿐만 아니라 현재 사회에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나의 친구여, 죽음의 회피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의를 피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부정은 죽음보다도 빨리 달리기 때문입니다. 


크리톤

통독: 2013.05.03 ~ 2013.05.04


크리톤과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옮겨 놓은 것이 크리톤입니다. 

내용은 매우 짧지만, 소크라테스의 국가관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인 듯 합니다.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에서 감옥에서 도망갈 것을 권유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도피를 권유했는데 소크라테스가 거절했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며, 

친구의 목숨보다 돈을 소중히 여겼다고 비난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크리톤,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구애될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많은 사람들은 최대의 해를 끼칠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또한 그들은 최대의 선도 이룩할 수 있을게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어느 쪽도 하지 못하네.

그들은 사람들을 현인으로도 바보로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이어지는 정의, 선, 명예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크리톤은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나옵니다. 

특히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국가가 부모님의 결혼을 허락하고, 교육을 인정해주고, 등등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 그 시대에 이러한 정의론과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다시 한번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정의를 생각하게. 

만일 당신이 크리톤이 하라는 대로 하면 당신이나 당신에게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더 행복해지지도, 

더 신성해지지도, 더 올바르게 되지도 않고, 또한 저 세상에서도 더 행복해지지는 않기 때문일세. 

이제 당신은 무고한 몸으로 피해자로서 떠나가는 것이지 악행을 한 사람으로 떠나가는 것은 아니네. 

법률이 아니라 인간의 희생자로서....


파이돈

통독: 2013.05.05 ~ 2013.05.17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철학적인 단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앞두고 그가 가진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의 불멸과 환생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심미아스와 케베스와 대화하는 형태로 되어 있고, 중간중간 크리톤이나 아폴로도로스도 등장을 합니다. 

에케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지켜본 파이돈에게 설명을 요청하고 그가 이야기 하는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책의 제목이 파이돈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작성한 글이므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기반으로 플라톤이 자신의 생각을 보다 정리해서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네요. 


사람들이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묘한 일인가, 

그리고 쾌락의 반대라고 여겨지는 고통과의 관계도 또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

쾌락과 고통은 동시에 같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은 없으면서도 그 중 하나를 추구해서 얻은 사람은 대체로 다른 하나도 어쩔 수 없이 얻게 마련이기 때문이야. 


쾌락을 지나치게 추구하다 보면 결국 고통이 뒤따르는 것은 누구나 겪어보면서도 되풀이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자살이 왜 옳지 못한지를 소나 나귀의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철학자는 죽음을 맞이하여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죽은 다음에는 저 세상에서 최대의 선을 얻는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슬퍼하고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육체를 사랑하는 자이며, 

동시에 돈이나 권력 또는 두 가지를 다 사랑하는 자일지도 모른다는 충분한 증거야 


가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소크라테스가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지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는 것만 교과서에 부각되어서 그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ㅠㅠ


이제 죽음과 삶의 발생부터 시작해서 불교의 윤회설과 같은 영혼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즉,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 바람에 날려 흩어져버려서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죠. 


이에 대한 케베스와 심미아스의 질문에 대하여 소크라테스 특유의 질문/답변으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자연, 삶과 죽음, 육체와 영혼에 대한 다소 철학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읽어봐서인지 어느정도 이해가 되네요.. ^^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철학자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던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변명, 크리톤, 파이돈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향연

통독: 2013.05.17 ~ 2013.05.19

 

에로스(사랑)에 대한 찬양을 다루고 있는 향연은 예전에 한번 읽어본 적이 있어 빠르게 봤네요. 

등장인물들이 돌아가면서 에로스에 대한 찬양을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파이드로스는 에로스는 신들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존귀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다음에나 인간이 덕과 행복을 얻도록 돕는 일에서도 가장 강력하다고 주장합니다. 

 

파우사니아스는 두 종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요. 

천상적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받는 사람이나 덕을 얻기 위해 노력하도록 하는 것이 때문에

나라와 개인을 위해 가치 있는 사랑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의사인 에리크시마코스는 건강한 육체와 병든 육체를 예로 들면서 고상한 사랑과 비천한 사랑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원래 두얼굴과 두몸으로 되어 있는 인간이 반으로 쪼개지면서 

서로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사랑이 나타났다는 조금 신화적인 이야기를 하지요. 

 

모임을 주최한 아가톤은 사랑은 첫째로 아름다움과 선 자체에서 최고이고, 

둘째로 다른 사물에 있는 이러한 성질의 원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가 특유의 대화법을 통해 사랑, 즉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순수하고 혼합된 것이 없는 절대적 아름다움 자체를 본 사람, 

인간의 살과 색깔과 보잘것없는 폐물에 의해 더렵혀진 아름다움 대신에 홀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신적인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의 지복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적절한 능력을 갖고 절대적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절대적 아름다움과 일체가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의 생활을 보잘것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절대적 아름다움을 보는 곳에서만 진리의 반영이 아니라 진리 자체와 접촉하기 때문에, 

선의 영상이 아니라 참된 선을 알게 되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릅니까?

그리고 참된 선을 알고 그러한 덕을 쌓았기 때문에, 그는 신의 사랑을 받고, 

만일 인간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영생할 특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는 에로스가 아닌 소크라테스에 대한 찬양을 하면서 마무리됩니다. 


책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가 서양 철학의 시작이고, 4대 성인으로 대우를 받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앎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려는 노력, 그리고 양심에 따른 행동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진면목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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