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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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서평

삶의 의미…

빅터 프랭클이 로고테라피에서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는 삶의 의미를 책임감, 사랑, 그리고 시련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저자는 시련을 바라보는 관점을 더 강해지는 계기로 봐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시련에 대한 정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3월 30일에 수용소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은 

그 희망이 절망이 되었을 때 오히려 시련을 이겨낼 힘을 빼앗아 간다고 했다. 

실제로 그런 꿈을 꿨던 사람은 3월 31일 면역력이 약해져서 죽음으로 수용소를 벗어났다고 한다. 


짐 콜린스의 Good To Great에서도 스톡데일 패러독스를 설명하면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눈 앞의 현실 속에 있는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난 후, 한동안 눈을 감고 생각을 했었다. 

"역설적인 운명의 결과라면 스스로 준비해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까?"

"나는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류와 미천한 인격을 가진 부류 중 어디에 해당할까?"

"실직과 같은 일시적인 삶에 대한 불안감으로 너무 안정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현재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어려운 시기에 삶을 한번 되돌아 볼 수 있는 책이었던 것 같다. 

 


밑줄 긋기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 했다는 것을...

 

정신의학에 보면 소위 '집행유예 망상'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실날같은 희망에 매달려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감정이 무뎌진 수감자라고 할지라도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랐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 사랑의 굳건함, 내 생각,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진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 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환자의 실존 안에 숨겨져 있는 '로고스'를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상당한 분석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로고테라피의 주된 관심사가 어떤 의미를 성취하는데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구별된다.

 

신경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예기불안은 역설의도로 좌절시켜야 하고,

과잉의도와 과잉투사는 역투사의 방식으로 좌절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 역투사는 환자가 자신의 삶에 주어진 특정한 과업과 사명을 바라보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예기불안: 마음 속의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 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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